친구 연락이 온다. “오늘 뭐하냐?” 최근에 와인에 빠지기 시작한 친구, 또 와인 마시자고 할 모양이다. 처음에 와인 같이 마시기 시작하더니만 어느 날 와인 동호회도 나가더니만 이런 저런 와인 이름 거들먹거린다. 현학적인 것은 딱 질색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장단을 마냥 무시하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셀러에서 얼마 전 산 비싼 와인 가지고 나간다. 이미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길거리에는 얇은 옷 보다는 약간씩 부드러워 보이는 원단으로 치장을 한 옷들이 하나씩 눈에 뜨인다. ‘그래 추위를 많이 타는 이들은 벌써 저렇게 입어야 하겠지? 그래도 나는 멋을 위해 약간의 추위는 감내하는 사람이야.’

매일 소주만 마시던 친구들이 갑자기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모인다. 왁자지껄, 그리고 안보이던 얼굴도 한 둘 보인다. 와인 동호회에서 알게 된 사람이란다. 왠지 좀 어색하다. 그래도 보아하니 꽤나 번듯하게 생겼고 직업도 괜찮다. 다들 꺼내놓은 와인들 보니 나름 괜찮은 와인들이 여럿이다. “어서 와라, 너 오느라 기다렸다. 자 여기는 아무개고 여기는 아무개. 인사들 하세요.” 어색한 인사가 끝나고 이내 와인 자리가 펼쳐진다. 웨이터는 나에게 테이블 세팅을 해 주고 서로 와인 이야기를 한다.


“이번에 퐁테 카네 가격이 너무 올랐어...”
“그래, 맞아, 아직은 너무 어린 것 같던데, 그런 와인 마시면 좀 돈 아깝다 생각 하지 않냐?”
“아냐, 그래도 이 정도는 마셔줘야지. 안 그래?”


그리고는 대뜸 질문이 내게로 돌아온다. “너 무슨 와인 가지고 왔냐?” 이미 마음이 좀 상한다. 내게 그 정도 이상의 와인이 나올 것을 기대하는 듯한 무언의 압력, 압박. 이것으로 이들이 나를 판단하겠지? 나름 고민해서 꺼낸 와인인데 이 친구 무슨 속셈으로 이런 말이지? 그리고 준비한 와인을 살며시 꺼낸다. Ramey Chardonnay Carneros Ritch Vineyard. 병은 멋지고 아름답지만, 아직 거의 알려지지 않은 와인이다. 물론 컬트고 가격도 제법 주었다. 그러나 친구들은 이 와인을 대충 보더니 “이 뭐냐, 그냥 달다고만 하는 미국 샤도네이네? 미국 나파에서는 당연히 카베르네 소비뇽을 마셔야지 이런 와인 왜 가지고 왔냐? 그래도 가지고 왔으니 일단 마셔보자.” 이미 속이 상할 대로 상한다. 서빙이 시작된다. 잔 하나에 나누어서 친구들에게 깨알같이 나누어준다. 이미 사람들이 많으니 제대로 맛을 느끼지 못한 채로 훌쩍 떠넘긴다. 게다가 그 자리에 있던 와인 전문가라는 사람은 “역시 나파 지역의 샤도네이는 급이 따르지 못합니다.” 이럴 수가, 나에게 이렇게 면박을 주고 상처를 주어도 되는가?

그러나 나는 꾸준히 기다렸다. “너 왜 그 와인 안마시냐” 보채지만 나는 다른 와인 마시고 기다린다. 1시간 반이 흘렀을까, 내 코에 대어보니 놀라운 아로마가 피어오른다. 이제 전투준비가 끝난 것 같아서 나는 이렇게 회심의 일격을 던진다. “자, 지금 한 모금 마셔볼래?” 다들 코에 들이대는 순간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어느덧 ‘나파 지역의 샤도네이는 급이 따르지 못한다. “하는 그 전문가의 말도 말 사이에 파묻혀 버린다. 그래서 그나마 나의 명예는 회복되었지만, 처음의 그 상처는 어떻게 치유할 것이란 말이던가? 왜 정성껏 준비한 와인에 대해서 고맙다 감사하다 말 한마디는 못할지언정, 왜 그렇게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는 것일까? 다음 모임에는 어차피 이런 저런 소리를 들을 것이라면 저렴하고 아예 구박 받을 와인일 것이니 아주 싼 것을 가지고 나갈까? 아니다 그러면 또 날 부르지 않겠지... 모임을 버릴까, 아니면 내가 맞는 사람들과 와인을 마실까? 만감이 교차하네...

지금까지는 하나의 가상 상황이다. 여러분들은 와인 모임에 나갈 때 어떤 와인을 가지고 나가는가? 그리고 그 와인을 가지고 가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그러면 와인 모임에 나갈 때 어떤 와인을 고를 것인지에 대해서 찬찬히 뜯어보도록 하자.

◈초심자인데 고급 모임 자리에 가는 경우
  일단은 내 경제상황을 보자. 그리고 무조건 잘 알려진와인중 어느 정도 고급을 가지고 나가자. 가급적이면 보르도 그랑크뤼가 이름도 잘 알려져 있으니 좋다. 1등급은 너무 엄청나고 2등급의 마르고 지역 정도면 좋다. 브랑캉드나크도 좋고, 듀포르비방 같은 잘 알려지지 않은 2등급도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 4등급의 프리외뢰 리신 같은 와인도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 그랑크뤼에서 잘 고르면 가격이 저렴하면서도 좋은 자리에 내기 좋은 와인이 많다. 대개 주최자가 와인에 대한 양해를 레스토랑과 협의 해 두었으므로 안심하고 가져가자. 물론 협의가 어떻게 되었냐에 따라서 도매급으로 진상 소리를 들을 수도 있지만. 그리고 레스토랑 스텝들을 위해 꼭 한 잔 남겨주는 센스는 발휘하자.

◈와인을 잘 알고 고급 모임 자리에 가는 경우
  남들을 깜짝 놀라게 할 와인을 준비 해 보자. 오히려 브랜드 이름이 잘 알려져 있지 않고 내가 이미 마셔본 와인 중에서 남을 놀라게 할 수 있는 와인을 가져가보자. 간혹 블라인드 테이스팅으로 해 보아도 재미있다. 그리고 그 와인의 이야기는 꼭 기억해서 가자. 그러면 타인이 와인에 대해서 빠르게 몰입할 수 있다.

◈와인을 모르는 친구들을 만날 때
무조건 저가 데일리 와인으로 가져간다. 우선 공중 살포한다는 개념으로 생각해야 한다. 가장 저렴하게 산 와인들이 있다면 그 와인들을 사둔 다음, 어느 날 여러 병 가져간다. 그리고 와인 맛을 보게 한다. 맥주잔도 좋고 어떤 잔도 좋다. 우선 열심히 가지고 나간다.

◈와인을 한두 번 가지고 가니 이제 내 와인에 맛 들기 시작한 친구들을 만날 때
여러 병 가져가거나 친구들에게 맛을 보여주니 이제 와인 맛을 안다. 그러면 친구들이 은근히 나의 와인을 바란다. 속으로 생각하니 얄밉다. 나도 자선업자가 아닌데 나만 할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런 경우에는 내 와인의 병수를 줄이고 항상 좀 굶주리게 하자. 목마른 자라 물을 찾는 법. 그리고는 친구들에게 한 병씩 가지고 모이자 제안해보자. 알아서 와인을 가지고 나올 것이다. 내 와인도 있고 친구들 와인도 있고, 너무 비싼 것은 지양한다. 사람이 많을 때 좋은 와인을 개봉하면 그 와인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도 없고, 제대로 주변에서 평가 받을 수도 없다. 마지막에 소비자가 3~4만 원대 와인 한 병 끼워서 평가를 관찰하는 방법도 좋다.

◈편안하고 소중한 친구를 만날 때
그래도 기본 되는 와인은 가지고 나가야 한다. 소비자가 4~6만원 사이의 합리적으로 맛있는 와인을 가지고 나간다. 와인의 상태가 좋지 않거나 취향에 맞지 않으면 이야기의 분위기를 해친다. 와인이 약한 친구면 리슬링도 좋고, 피노 누아르 한 병을 가져가도 좋다. 와인이 친구와 이야기를 이끌어 나아가는데 윤활유가 됨은 당연지사다. 다만 레스토랑 등에서 만나게 될 것이므로, 두 병 세 병 가져가려면 레스토랑에 우선 안면을 틔운 다음 어느 정도 양해가 가능할 때 하고, 처음 방문하는 레스토랑이면 가급적 가져가지 않는 것이 좋다. 그리고 어떤 경우라도 가는 경우에 그 곳의 와인 한 병은 꼭 주문하는 센스는 잊지 말자.

◈와인을 잘 아는 편안한 친구를 만날 때
와인을 잘 아는 편안한 친구라면 소중한 와인을 준비하자. 이 세상에 좋은 벗과 마시는 와인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소중히 준비하고 그 이야기가 교감하는 시간을 그리워하라. 비록 저녁 한 두 시간 만나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지만 찰나가 영원일 수 있듯 그 시간은 그 어느 시간보다 소중한 법이다.


대학교 1학년 당시 나의 어머니께서는 “아들아, 나이가 들면 젊은 시절 아름답고 예뻤던 기억만 남게 된단다”하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얼마 전 비슷한 이야기를 다시 들었다. 단편의 추억은 예쁘게 다가온다고. 우리의 뇌는 그런 아름다운 기억을 남기기에도 비좁다. 하물며 나쁜 기억 나쁜 습관 나쁜 관점을 남길 이유가 있는가? 넓은 범위의 와인도 존재하지만 좁은 범위의 와인도 존재한다. 그 존재 사이에서 호흡하고 느끼자. 와인이 아름다운 매개체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출처:와인21'와인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