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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희다고 화이트와인이 아니다? 붉다고 레드와인이 아니다?
날짜 13/04/24
글쓴이 Wine4Love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가늘고 긴 다리를 가진 모양의 와인 잔은 보는 이로 하여금 와인의 멋을 대표하는 하나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기능적인 측면도 충실하게 고려한 것이다. 와인 잔의 옆 곡선 보양은 사람의 입술에 닿는 면적과 혀에 닿는 면적, 코에 향이 닿는 면적까지 상당히 과학적으로 설계되어 있다. 그리고 이 부문에 있어서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가진 회사는 독일의 리델과 슈피겔라우를 꼽을 수 있다. 미학적으로도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기능적으로도 포도 품종의 특성을 고려하여 만든 것이니 과학과 예술의 만남이라 할 수 있다. 와인 잔의 투명함은 와인의 색을 좀 더 빠르게 확인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음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 두 회사에는 아주 기묘한 와인 잔이 있다. 안을 도무지 살펴볼 수 없는 완전히 검은 잔이다. 두 회사 모두 이 잔을 블라인드 테이스팅 잔으로 명명하였다.(솔직히 리델사에서 몇 년 전 슈피겔라우사를 인수했으니 같은 회사라 불러도 무관하겠다.) 그렇다면 왜 이런 기묘한 잔을 만들어냈을까? 여기서 잠시 다른 이야기로 주제를 돌려보자.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 중에서 사람들에게 눈을 가린 채로 콜라와 사이다를  맛보게 하면 사람들이 그 맛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사람의 눈이 사물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그 만큼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일이 와인에 있어서도 일어날 수 있을까? 레드 와인인데 화이트 와인의 느낌이 나고, 화이트 와인인데도 불구하고 레드 와인의 느낌이 날 수 있을까? 나의 대답은 “그렇다”다.

얼마 전 나는 지인분을 만나 재미있는 부르고뉴 볼네(Volnay)지역의 와인을 맛보았다. 생산자는 부르고뉴 지역 화이트의 맹주중 하나인 올리비에 르플레이브(Olivier Leflave)였다. 포도원 사위와 만나서 이야기 할 때에도 화이트에 대한 이야기만 열심히 했고, 그들의 숙성 잠재력, 새로운 방식을 사용한 콜크 등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그들에게서 생산한 피노 누아르라 하니 생뚱맞기도 했지만 호기심이 발동했다. 부르고뉴 잔에 따라 내었다. 그런데 내 입 안에서는 피노 누아르의 풍미 보다는 오히려 부르고뉴 풀리니 몽하쉐 혹은 샤샤뉴 몽하쉐 같은 미네랄과 섬세함이 더 많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게다가 온도는 레드 와인에 맞추어져 있어서 그런지 높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당장 소믈리에에게 이 와인을 아이스 버킷에 넣어달라 요청했다. 온도가 화이트까지 떨어지니 각종 꽃향기와 함께 섬세하고도 부드러우며 여성적인 아로마가 피어 올랐다.

이와 상반되는 경우도 있다. 얼마 전 나는 미국 나파 지역의 르로이 여사로 불리는 헬렌 털리(Helen Turley)의 수제자, 마크 어버트(Mark Aubert)가 만든 와인을 맛볼 기회가 있었다. 그는 헬렌 털리와 함께 피터 마이클(Peter Michel), 콜긴(Colgin)에서 함께 와인을 양조하였으며, 지금은 자신만의 와인을 만들고 있다. 그는 자신이 소유한 포도밭이 없고 포도를 구매하여 자신의 양조시설이 아닌 다른 포도원의 양조 시설을 빌려 양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천재성은 빛을 발휘하고 있다. 그는 와인 메이킹을, 그의 부인은 주문을 받아 와인을 발송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한다. 그의 와인은 필터링을 하지 않기 때문에 탁한 색을 띠고 있는데, 이런 경우는 이탈리아의 요스코 그라브너(Josko Gravner) 같은 바이오다이나믹 농법을 채택한 와인메이커 등 작은 포도원들이 쓰는 방법이다. 대개 리(효모)를 오크통에 함께 넣고 숙성하기 때문에 와인의 깊은 맛을 주기는 하지만 매번 정기적으로 오크통 내부를 휘저어주어야 하기 때문에 여간 손이 많이 가는 것이 아니다.

그의 와인은 상온에서 디켄팅을 1시간가량 하니 제대로 열리기 시작하였다. 잔은 화이트 잔이 아닌 부르고뉴 잔에 제공을 해야 했다. 화이트 와인이지만 화이트 와인이 아니었던 셈이다. 만약 어버트를 화이트 잔에 아주 차게 해서 서빙을 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산미가 살아나고 보디감 있는 알코올이 다듬어져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면에 숨은 풍만하고 가슴 따뜻한 느낌은 제대로 느낄 수 없을 것이었고, 디켄팅에서 주는 엄청난 보디감은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와인은 레드 와인일까 화이트 와인일까?

물론 세상 모든 와인에 풀 보디도 있고, 미디엄 보디도 있고, 라이트 보디도 있다. 단 와인, 신 와인, 떫은 와인, 향이 풍부한 와인, 신선한 와인, 숙성된 와인 등등 각양각색이다. 그렇지만 잘 생각해보면 우리는 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에 대해서 유독 엄격한 선입관을 그어두는 것 같다. 가장 수월한 분류이기는 하지만 늘 그 것에 얽매여서 생선에는 화이트, 고기에는 레드라는 공식을 머리에 둘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그리고 만나다 보면 이렇게 의외의 모습을 보여주는 와인들도 존재한다. 그래서 와인 잔 생산자가 색상의 선입관마저 없애는 검은 잔을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와인의 세계는 느끼면 느낄수록 끝이 없음을 시간이 갈수록 더 깊게 느끼고 있다. 아직도 마셔보아야 할 와인이 산더미임에 행복감이 밀려온다. 내가 와인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출처:와인21닷컴 '뉴스News>칼럼'



최종수정일 : 2013/04/24 Wed 14:5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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