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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와인을 마실 때는 잠깐씩 집중을...
날짜 16/09/28
글쓴이 W.4.L

바람이 선선해졌다. 벌써 집중력이 올라간다. 물에 젖은 수건 마냥 축 처져 있던 혓바늘도 선선한 바람 덕분에 힘이 바짝 들어가기 시작한다. 혀와 입과 코가 민감하게 반응하니 와인 마시기 좋은 시절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레드 와인의 경우 온도를 맞출 고민 하지 않아도 어지간하면 척척 맞아떨어지니 와인 애호가들에게는 최상의 시절이라 하겠다. 올 여름 마셨던 레드 와인 열의 아홉은 반드시 냉장고에 보관을 부탁하거나 아이스 버킷에 넣었어야만 했으니, 얼마나 더운 여름이었던가. 그 여름도 갔다. 남자들이 윈드서핑보다 잘 탄다는 가을도 올 기미가 보인다. 당연히 마음이 차분해진다. 아니, 차분해야만 한다.
 
나는 셀러가 없고 보관하는 와인이 없는 사람이라 가지고 싶은, 보관하고 싶은 와인도 없다. 행여나 와인 자리 있으면 그 날 마실 것 근처 숍에 가서 하나 사들고 간다. 그러다 보니 유독 기록에 집중하고 그 와인의 기억을 붙잡으려 애를 쓴다. 마실 때에 집중하고, 행여나 와인을 마실 기회를 얻게 되면 그 기회를 준 사람이나 조직에 대해 깊이 감사함을 표현하는 것은 당연하다. 생각해보면 이런 행위 하나하나가 과거에 머무르고자 하는 나의 집착으로도 보일 수 있지만, 내 성정이 이러하다 보니 계속 쓰고, 기억하고 남기게 된다. 기록을 남기다 보니 생긴 습관이 하나 있는데, 와인을 느낄 때에는 잠시간 완벽하게 집중하는 것이다. 많은 와인 전문가들이 이러한 것에 익숙해져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일반 애호가들보다는 좀 더 깊은 와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 본다.

와인에 순간적으로 집중하는 이유는, 이 순간이 다시는 오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내가 시음해보았던 와인들의 리스트를 살펴보니 오래전 피숑 라랑드 1982년이 있었다. 당시에는 그나마 마실 수 있는 가격대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쌌다는 말은 아니다), 시음 적기에 접어들었다는 말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니 그 와인을 내가 다시 만나는 일은 코타키나발루에서 오바마를 만나는 것보다도 더 힘든 일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희소성과 함께 가격, 그리고 그 당시의 느낌을 고스란히 재연해내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시점의 순간을 지금으로 다시 가져올 수도 없고, 그 순간은 그 상태로 이미 끝났다. 내가 이 와인을 만나기도 매우 힘들겠지만, 그 순간은 그 자체로 마지막이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수많은 마지막을 경험해 왔다. 앞으로 살아갈 날 동안 경험하게 될 미지의 것이 많이 있지만, 우리가 평생 더 이상 경험하지 못할 것들이 매우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주었던 잊을 수 없는 선물, 젊은 시절 경험한 여러 가지 에피소드, 실연의 상처, 연인과의 행복한 순간, 뇌에 각인될 정도로 아름답고 멋진 풍경, 그리고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와인의 경험에 이르기 까지, 이 모든 것들 중에서 다시는 오지 않을 것들이 많다. 우리는 그런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들에 미련을 가지거나, 다시는 미래에 만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에 제대로 된 이별을 하지 못한 적은 없을까? 이 모든 것이 미련이자 집착은 아닐까? 그래서 나는 와인을 시음할 때에 이 와인을 행여나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될까 두려워 최대한 집중한다. 온전히 느끼고 그 순간을 만끽하려 노력한다. 순간순간 떠내보내는 아련함을 마음에 담아 집중한다.

그래서인지 어느 자리든 가면 그 와인의 병과 레이블 모양이 기억나고, 그 와인의 이름이 기억나며, 그 와인의 맛, 피니시마저 고스란히 기억나는 경우가 많다. 원하든 원하지 않던, 그 찰나의 집중으로 오랜 추억이 내 마음속에 남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마음이 오히려 그 순간에 더 집중하게 만들어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이 만나는 그 와인은 다시 맛볼 수 없을 수 있다. 비싸거나 희귀 와인인 경우 더더욱 그런 경우는 많을 것이다. 같은 와인이라도 숙성 전의 모습과 숙성된 이후의 모습, 꺾이기 시작한 모습 그 각각이 새로운 모습으로 드러날 수도 있을 것이다. 10대의 나, 20대의 나, 30대의 내가 제각각 다른 모습이듯, 지금의 내 모습 역시 전혀 다른 그 순간의 존재이었을 것이다. 과거의 나를 사진과 기억 말고는 더 이상 만날 방법이 없듯, 지금 만나는 와인 역시 다시는 오지 않을 수 있다. 다시 만날 수 없으니, 아주 짧은 시간 와인에 집중 해 보자. 주변 사람들의 대화나 주변의 음악에서도 잠시 탈피하여 짧게 집중 해 보자.

남들에게 민망할 정도로 너무 와인에 집중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마치 명상을 하듯 아주 짧은 시간 내 마음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와인에 집중해보면 새로운 느낌을 경험할 수 있다. 좋은 와인은 좋은 와인 자신만의 이야기를 전해주기도 할 것이며, 고가의 와인은 고가의 와인 그 나름대로 자신만의 아름다운 향연을 계속 보여줄 것이다. 다만 내가 얼마나 주의를 기울였느냐 하는 것이다. 와인은 내가 눈을 기울이는 만큼 그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줄 것이다. 그 와인을 제대로 느꼈으면, 그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주변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 역시 영원히 오지 않을 당신의 찰나 같은 행복의 끝이자 시작일 것이기 때문이다. Carpe diem!



출처:와인21닷컴>뉴스News>칼럼



최종수정일 : 2016/09/28 Wed 15: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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