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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 사주에 맞는 와인이 있다?
날짜 17/10/19
글쓴이 W.4.L

음악평론가 강헌. 음악 좀 듣는다는 사람치고 그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음악뿐 아니라 영화와 미식에도 조예가 깊고, 수려한 필력과 화려한 입담으로 평론계의 한 획을 긋는 강헌 선생은 최근 두 개의 타이틀 더 얻었다. 바로 ‘와인 전문가’와 ‘명리학자’다. 와인은 이해가 되지만 어떻게 명리학까지 섭렵하게 됐을까. 궁금해서 견딜 수가 싶었다. 지인을 통해 어렵사리 연락이 된 강선생은 흔쾌히 인터뷰에 응해주었다. 그를 만난 것은 2017년 10월 첫날, CD와 책으로 삼면 벽이 빼곡한 그의 서재에서였다.

“저는 원래 소주와 위스키 외에 다른 건 술 취급도 하지 않던 사람입니다.” 와인을 좋아하게 된 계기를 묻자 그는 이렇게 말을 시작했다. 맥주도 그와 맞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맥주가 목(木) 기운이 강해서라고 한다. 사람마다 타고난 사주와 체질에 따라 맞는 술도 제각각이라는데, 필자는 화(火) 기운이 필요한 사주여서 와인이 잘 맞는다 하니 천만다행이다. “와인을 처음 접한 건 약 30년 전이었어요. 당시 우리나라엔 와인이 흔치 않았는데, 친구가 프랑스에서 와인 열여섯 병을 가지고 온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꽤 좋은 와인이었을 것 같은데, 둘이 그 많은 걸 하룻밤에 다 마시고 ‘도대체 언제 취하는 거냐?’하며 불평했던 기억이 납니다.

결국 집 앞 구멍가게에서 싸구려 위스키 한 병 사다 마시고 곯아떨어졌지요.(웃음)”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 강선생은 대동맥이 70센티미터나 찢어지는 대동맥박리라는 병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었다. 그는 혼수상태로 23일을 중환자실에 누워 있다 기적적으로 깨어났다. 2개월간 입원한 뒤 휠체어를 타고 겨우 퇴원하는 그에게 의사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했다. “길어야 2년이니 삶을 잘 정리하십시오.” 큰 충격에 아무것도 할 수 없던 그의 머릿속에 불현듯 재수시절 친구 아버님이 해준 말씀이 떠올랐다. 그분은 역술인이었다. ‘마흔두 살이 지나면 건강 문제로 큰 고비가 온다. 그리고 너 결혼 세 번 한다.’ 이십 년 넘게 잊고 있던 그 말이 왜 그때 생각난 것일까. 당시 두 번째 이혼을 앞두고 있던 강선생은 인간에겐 정말 정해진 운명이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고 한다. 그는 후배에게 서점에서 역술 관련 책을 모조리 다 사 오라고 부탁했고, 명리학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2년이 지났지만 강선생은 죽지 않았다. 요양을 하다 보니 몸도 나아졌다. 그러자 슬며시 소주 생각이 났다. “소주를 사와 한 잔 마셨는데 죄다 토했어요. 혹시나 싶어 남은 것을 냉장고에 넣어두고 다음 날 또 마셔봤습니다. 마찬가지였어요. 소주는 냄새도 못 맡겠더라고요.” 정기검진에서 만난 의사에게 그는 ‘앞으로 영원히 술은 못 마시는 거냐’고 물었다. 술 때문에 죽을 고비를 넘긴 그가 술 얘기를 꺼내니 의사는 기가 막혔지만, ‘와인이 심혈관 계통에 좋다는 논문이 꽤 있으니 와인 한두 잔쯤은 괜찮을지도 모르겠다’는 “복음”을 그에게 던졌다고 한다. 강선생은 바로 와인을 공부했다. 술을 못 마시니 와인을 책으로만 공부하면서 마시고 싶은 와인을 적어두기 시작했다.

요양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자 친구들은 그에게 뭐가 먹고 싶냐고 물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친구들에게 기록해둔 와인을 배정했다고 한다. “1년 반 정도는 녀석들 덕분에 좋은 와인 많이 마셔봤죠.(웃음)” 2년쯤 지나 더 이상 뜯어먹을(?) 친구가 없자 그는 경리단에 작은 바를 열었다. 지금처럼 경리단이 유명해지기 전이었다. 마시고 싶은 와인을 손님께 권하고 자신도 한 잔 얻어마실 수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더란다. 그는 바를 운영하면서 와인의 장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고 했다. “위스키를 마시는 테이블은 시간이 조금 지나면 데시벨이 세 배쯤 커져요. 서로 싸우듯이 목소리가 높아지죠. 하지만 와인을 마시는 테이블은 조용하고 우아합니다. 와인은 공존형 술이거든요. 사람을 성찰하게 만들어줍니다.” 강헌 선생과 얘기를 나누다 보니 인간의 삶과 와인이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주에도 좋고 나쁨이 있고, 와인 빈티지에도 좋고 나쁨이 있어서다. 하지만 사주가 좋아야 행복한 삶을 사는 것도 아니고 나쁜 사주로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는 것처럼, 빈티지가 좋다고 해서 무조건 맛있는 와인이라 할 수 없고 망한 빈티지라도 잘 보관하면 얼마든지 맛이 좋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필자의 이런 엉뚱한 의견에 강선생은 본인의 경험으로 호응해 주었다. “10년 전쯤이었을 겁니다. 와인을 잘 모르는 지인이 1975년산 슈발 블랑을(Cheval Blanc)을 좋은 가격에 한 케이스 샀다며 기뻐한 적이 있었어요. 왜 물어보지도 않고 샀냐고 타박을 놨죠. 1975년은 좋은 빈티지도 아니고 보관 상태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을 것이 뻔했거든요. 그런데 그 와인 맛이 정말 환상이었습니다.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반대로 얼마 전에는 모 회장님의 연락으로 1983년산 페트뤼스(Petrus)를 마셔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정말 기대가 컸어요. 하지만 맛이 절정을 지나 살짝 꺾인 상태였습니다. 실망스러웠죠. 관리를 잘못한 것 같더라고요. 유적지를 탐방하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요. (웃음).” 강선생은 특별히 나쁜 사주란 없다고 주장한다. 좋은 사주란 평탄한 삶이고 나쁜 사주란 굴곡이 큰 삶을 의미할 수 있는데, 큰 일을 이룬 사람의 사주를 보면 오히려 좋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는 척박한 땅에서 자란 포도가 명품 와인을 생산해내는 이치와 같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강헌 선생은 레드 와인에는 화의 기운이, 화이트 와인에는 목과 화의 기운이 많다고 했다. 그렇다면 ‘각자의 사주에 따라 잘맞는 와인이 있냐’는 필자의 질문에 그는 단순하게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개개인의 사주를 면밀히 분석해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대신 그는 와인은 반드시 함께 즐겨야 하는 술이라고 역설했다. “혼밥과 혼술이 유행한다지요? 하지만 좋은 와인을 혼자 마시는 것이야말로 가장 멍청한 짓이에요. 와인은 복수의 사람을 이어주는 술이기 때문이죠. 와인 좋아하는 사람이 주변에 없어 혼자 마시나요? 카풀도 있고 요즘엔 밥풀도 있다는데, 와인풀은 왜 안 만들죠? 와인은 함께 즐길 때 가장 행복하고 빛나는 술입니다.”

강헌 선생과 유쾌하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세 시간이나 흘러 있었다. 그동안 와인을 두 병 마셨으니 각 일 병 한 셈이다. 필자의 마지막 질문은 ‘똑같은 와인도 마시는 장소에 따라 맛이 다른데, 명리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현상인가’였다. 막상 입으로 뱉어 놓고 보니 너무 황당한 질문인가 싶었지만, 그는 의외로 일리가 있다고 답했다. “서울은 여러 가지 기운이 섞여 있는 곳입니다. 서울 안에서도 남산과 관악산은 특히 화 기운이 많은 곳이지요. 그래서 그 산에는 물이 없습니다. 와인이 화의 기운을 담고 있으니 화 기운이 많은 곳에서 마시면 더 맛있을 수 있지요.”

어느덧 추석도 지나 이제 가을 한 중간이다. 곧 단풍이 흐드러질 터다. 작은 병에 맛있는 와인을 담고 피크닉용 플라스틱 와인잔을 챙겨 사부작사부작 남산을 올라볼까. 음주 산행은 위험하니 딱 한 모금만 해야겠다. 아, 물론 친구와 함께 말이다.



출처:와인21닷컴>뉴스News>칼럼



최종수정일 : 2017/10/19 Thu 10:4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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