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들이 함께 자리를 했다. 고소하면서 기름진 푸아그라(거위간)를 애피타이저로 주문해둔 상태다. 프렌치 음식을 앞에 두고 점심식사라 하여 스파클링 워터로 와인을 대신한다는 건 생각만 해도 고문(?)이다. 슬그머니 와인 리스트를 손에 넣었다. 와인을 고를 수 있는 자격은 호스트에게 주어지는데 그날 만큼은 와인 애호가인인 A씨에게 와인 리스트를 조심스레 건넸다. 와인을 잘 아는 사람에게 호스트가 와인 선택권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상하 좌우로 열심히 눈동자를 굴리며 훑더니 손가락으로 프랑스 부르고뉴의 백포도주가 원료인 샤르도네(Chardonnay)의 백미 샤블리(Chablis) 와인 중 드라이 화이트 와인인 몽라쉐(Montrachet)를 가리킨다. 사과나 감귤류와 같은 과일향기가 나며 오크통 속에서 숙성이 오래된 것은 바닐라 향까지 난다는 몽라쉐는 레드 와인보다 가벼워 점심에 즐기기에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밥값(?)을 책임져야 했던 그날의 호스트는 10명의 식사 비용에 스파클링 워터 한 잔씩만 나눠도 2병은 주문해야 하는 몽라쉐까지 꽤 부담이 됐을 것이다. 레스토랑을 방문하여 음식을 먹은 후 글 쓰는 작업이 직업인 필자는 대충 어림잡아도 꽤 되는 식사 비용이 짐작이 갔다. 내심 호스트에게 미안한 맘이 드는 순간이었다.

보고 싶은 사람들과 맛난 음식을 섭취하며 와인 한 잔을 곁들이는 여유와 만족감은 약효 있는 쓰디쓴 보약 한 사발을 들이키는 것 이상의 삶의 영양제 역할을 한다. 금전으로 환산 불가능한 부분이 아니던가. 하지만 간과해서는 안될 일이 있어 이렇게 긴 서론을 풀어놓는다.

요즘처럼 와인에 대한 관심이 넓고 깊어진 적은 없었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와인 관련 서적들과 와인 동호회를 비롯한 백화점 문화센터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열심이다. 하지만 와인의 맛에 빠져들고 음식과 조화로운 와인 선택 이전에 염두에 둘 점은 식사에 걸맞은 적정한 가격대의 와인을 선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호텔의 경우 와인 가격에 10% 세금과 10%의 서비스 비용이 추가되는 만큼 가격이 높은 와인일수록 비용부담도 커진다. 그런 취지에서 본다면 그날의 와인 가격은 음식가격의 4배에 달하는 절름발이 식사가 된 셈이다.

물론 이 세상엔 좋은 와인도 많고 꼭 마셔보고 싶은 다양한 와인들이 우리를 유혹한다. 제아무리 음식에 대한 풍부한 식견이 있다 할지라도 제대로 즐기는 예법, 즉 테이블 매너를 무시해서는 식사의 완성도가 떨어진다. 그래서 매너를 익히고 공부하는 시대인 만큼 좋은 와인과 더불어 가장 기본적인 몇 가지 예절은 지켜야 한다.

탁월한 와인 주문 방법과 매너를 간단히 소개해 보고자 한다.

첫째, 와인 리스트를 보면서 주문할 와인의 종류를 선택하되 가격대를 고려한다.

둘째, 한 사람의 음식값 정도에 해당되는 가격대의 와인을 주문한다.

셋째, 점심이나 간소한 낮 모임에는 1인당 와인의 양을 줄이고 저녁 식사라면 병당 5∼7잔을 고려하여 주문할 와인의 양을 정한다.

그리고 나면 와인 테스팅(시음)이 진행된다. 고대에는 집에 초청한 손님 앞에서 집주인이 먼저 와인을 마셔 보이며 독이 없음을 증명했던 게 오늘날에 와서는 자신이 주문한 와인을 제대로 소믈리에가 제공하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이 되었다.

와인 테스팅을 할 때는 소믈리에가 보여주는 병 레벨을 확인 뒤 코르크를 건네주면 향을 맡으면서 코르크에서 혹시 독한 곰팡이 냄새가 난다거나 심하게 말라있다면 소믈리에에게 다른 와인으로 바꿔달라고 할 수 있다. 고급 와인이라면 코르크에 음각된 이름도 확인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잔에 담긴 와인을 눈과 코로 와인의 빛깔과 향을 감상한 후 입에 머금고 오감으로 확인하면 된다. 이 시점에서 모두가 자신에게 시선을 집중한 만큼 속도감 있게 간단히 맛을 본다는 느낌으로 이른 시간에 진행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좋은데요’ 라고 한 마디로 마무리.

몇 년 전 모 특급호텔 관계자로부터 들었던 얘기가 생각난다. 호텔 카페로 옆구리에 작은 손가방을 끼고 등장한 한 일본인이 일행과 자리를 잡더니 와인 리스트를 보지도 않고 이 곳에서 제일 비싼 와인을 가져오라고 했단다. 그래서 잽싸게 보르도산 페투루스를 가져다 준 덕에 그날의 매출은 전혀 스트레스가 없었다는 후일담을 전해줬다. 일본인은 오래된 와인임에도 디켄팅도 없이 벌컥벌컥 들이켰다고 한다. 디켄팅은 오래되고 좋은 레드 와인에 침전물이 생기기 쉬워 행여 고급 와인의 풍미를 손상시킬 수 있기에 침전물만 병에 남기고 위쪽의 맑은 와인만 디켄터로 옮기는 과정을 일컫는 것이다. 더불어 병속에서 오랜 시간 갇혀 있었던 와인이 공기와 접촉하면서 향기를 풍성하게 발산시키는 목적도 있다.(약 30분 정도면 마실 수 있다)

와인은 과거 왕이나 평민, 영화배우, 대통령, 독재자 할 것 없이 즐겨 마시는 술이었다. 인류의 역사 만큼이나 오래된 술이기에 할 얘기도 많다. 와인을 고르는 일이 익숙한 이도 있겠지만 어떤 이에겐 아주 낯설고 당황스러 울 수 있다. 동양에는 와인이 익숙한 문화가 아니므로 일본인 관광객처럼 그저 가격만으로 와인을 주문할 수도 있고 서양음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좋은 와인만 고려한 나머지 식사 값에 동떨어진 와인을 선택할 수도 있다.

8000년 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이집트·고대 그리스·로마를 거쳐 지중해와 유럽의 서양 역사와 함께해 온 와인은 현재 미국·호주·칠레·뉴질랜드 등 신세계 와인으로 맥이 이어지고 있다. 와인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걸음마 단계인 우리의 열정이 수 천 년 문화 속에 꽃 피워 녹여진 와인 속으로 하루아침에 파고들기는 힘들 것이다. 문화권을 초월한 와인의 인기는 항산화 작용으로 몸의 노화를 방지하는 효과를 비롯해 심장병, 감기 예방효과가 있다고 연구보고서가 나와 있다. 천연 당분이 분해된 천연 알코올과 수분·철분·칼슘·칼륨 등이 어우러진 알칼리성 식품이다. 코르크 마개가 열리는 그 순간까지 바깥 세상과 호흡하면서 고요히 숙성되면서 살아 숨쉬는 살아있는 발효식품이 와인이다. 서양의 역사 전체가 와인 한 병 750ml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는 생각에 숙연함마저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