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아들보다 더 재미있게 보는 만화가 있는데 바로 '스폰지 밥'과 '마다가스카의 펭귄'이다. 이 만화들은 그저 재미있는 것도 재미있는 것이지만, 내부에 오묘한 심리적인 사항들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둘 중에서 하나를 꼽자면 단연코 ‘마다가스카의 펭귄’이다. 이 만화는 단순한 코믹 만화라기 보다는 부조리극에 가깝다. 아주 똑똑해 보이는 펭귄 네 마리가 나오지만 간혹 어떤 부분에서는 도저히 논리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곤 한다. 가령 어떤 약품을 개발하는데 7천년이 걸린다고 계산하면, "뭐가 그렇게 오래 걸려?" 하거나, "성공 확률이 약 2.6% 입니다"하면 "그거 해볼 만 하겠군"하는 식이다. 이 만화에서 필자가 아주 재미있게 본 에피소드 중 하나가 펭귄의 암수 구분과 관련된 것이다. 그리고 기계의 오류 때문에 자신이 암컷인줄 알게 되는 수컷은 아주 격렬하게 반응하는데, 그 때 나오는 것이 바로 '부정, 분노, 타협, 절망, 순응'의 다섯 단계다.

이 다섯 단계는 미국의 정신과 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sabeth Kubler Ross)에 의해 제시된 것으로서, 주로 말기 암 환자들이 암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어떠한 절차를 거치게 되는가를 차근차근 알아가게 되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아주 의미하는 바가 큰 것인데, 만화에서 담담하고도 유쾌하게 그려두었으니 필자가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퀴블러 로스는 인간의 죽음에 대해서 아주 여러 가지 연구를 한 사람인데, 어쩌면 스피노자(Baruch Spinoza)의 입장에서 그녀는 가장 불행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스피노자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죽음에 대해 가장 많이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 보여주는 모습을 고찰했을 뿐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과도하게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너무 불행하지는 않았으리라.

각설하고, 이 각각의 과정에서 우리는 결국 "순응"이라는 단계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인데, 정치범 수용소에 수용된 사람이나, 동물원의 동물 장기에 나오는 아주 혹독한 훈련을 받은 동물들이나, 혹은 테러에서 폭탄을 들고 뛰어드는 사람이나, 이 모두가 각각의 단계를 거쳐서 오는 것이다. 그래서 순응의 단계는 소름 끼치는 단계라 할 수 있다. 집에서 남편으로부터 매를 맞는 여인들을 보고 주변에서 그런다. "왜 그래요? 빨리 도망가버려요. 어떻게 그런 사람과 살 수 있죠?" 하면서 설득을 해 보지만, 결국 이 '순응'이라는 굴레에 빠지게 되면 쉽게 도망가기가 어렵게 된다.

그러면 이 무서운 순응의 단계에 빠진 실례를 보자면 필자 같은 와인 애호가(실은 쾌락주의자에 더 가깝다. 헤도니스트라고나 할까)가 될 것이다. 와인 애호가가 와인에 빠지는 단계를 이 다섯 가지에 대입해서 생각을 해 본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 물론 필자 역시 “순응” 단계에 접어들었다.



부정: 와인이라는 것을 처음 마시기는 했으나, 가격도 비싸고 도무지 내가 마실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피하게 된다. 그러나 와인 맛에 서서히 빠지기 시작한다. 신문 기사에 나온 리스트를 보면 저절로 와인에 빠지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그 것을 부정한다. “난 와인에 빠진게 아냐. 단순히 와인을 좋아할 뿐이야.”



분노: 그러나 그 와인을 계속 마시는 자신을 보면서 분노한다. 주변의 모든 사항들에 대하여 아주  분노한다. 와인 가격이 비싸서 분노한다. 지금까지 몰랐던 사실에 대해서 알고자 한다. 그리고 열심히 찾아서 헤맨다. 와인 가격이 비싸서 숍에 가면 그런다. “이거 다른 곳에서는 얼마 하는데 여기서는 왜 이리 비싸요?”하고 투덜거린다. 비싼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 보면 경멸한다. “당신들은 그렇게 와인을 자랑하며 마셔야 하는가? 당신들이 마시는 와인은 인민의 피가 아니던가?”



타협: 이젠 아주 스마트한 와인 애호가로 변신한다. 적절히 가격을 찾아가기도 하며 어디에는 가서 남이 먹다 남은 고가 와인이라면 몰래 두 눈 질끈 감고 한 모금 시음 해 본다. 남자가 먹던 잔이든 친구가 먹던 잔이든, 그 한 모금 마셔보려 열심히 노력한다. 저렴하게 판다고 하면 서울이든 미국이든 유럽이든 어디든 달려간다. 와인 서쳐를 찾아내고 그 속에서 자기 만족감을 찾아낸다. “그래, 나 아주 잘 가고 있어.”



절망: 결국 배우자의 지적 혹은 엄청난 재정적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와인 마시기를 포기한다. 그러나 그 맛은 잊을 수 없다. 그 비싼 와인을 마시고 싶어 하지만, 로마네 콩티의 가격이 올라가는 속도를 보면 이제 인민은 한 모금도 입에 대지 못할 것이라는 자괴감이 들고 만다. 아예 손을 댈 수 없는 보르도 톱클래스에 대한 절망이 나를 엄습해온다.



순응: 그래도 어쩌겠는가? 나는 와인 애호가인걸. 이젠 팩 와인만 보아도 가슴이 설렌다. 자주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만 보면 와인인 듯 가슴이 두근거린다. CDP를 보면 시디플레이어가 아니고 샤토 네프 뒤 파프가 먼저 떠오른다. 이제 난 제대로 와인 애호가구나. 진정한 와인 애호가구나 하고 스스로 자위한다. 과거에는 부정했던 자신의 현실도 직시하고 합리적인 와인을 찾아 다니며 이런 저런 와인을 찾아 다닌다. 나는 내가 아니었건만, 이제는 그렇게 된 것이다.


자, 묻는다.
당신은 지금 부정, 분노, 타협, 절망, 순응. 어느 단계에 있는가?


출처 : 정휘웅 블로거